한미약품, '근육 지키는 비만신약' 제넨텍에 최대 23억 달러 기술수출

한미약품이 비만·대사질환 신약 후보물질 HM17321의 한국 제외 전 세계 독점 권리를 로슈(Roche)의 미국 바이오 자회사 제넨텍(Genentech)에 넘겼다. 8월 24일 공시된 이번 계약의 총 규모는 최대 23억 달러, 약 3조 2000억 원이다. 이 가운데 1억 9000만 달러(약 2850억 원)는 개발 성패와 무관하게 한미약품이 확보하는 계약금이다. HM17321은 지방은 줄이되 근육은 잃지 않도록 설계된 후보물질이다.
계약 조건
이번 독점 라이선스 계약에 따라 제넨텍은 한국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HM17321의 개발·생산·상업화를 맡는다. 한국 시장 권리는 한미약품이 그대로 보유한다. 확정 수령액은 계약금 1억 9000만 달러이며, 나머지 금액은 개발·허가·상업화 단계별 마일스톤을 달성해야 순차적으로 들어오는 조건부 수익이다.
총액이 실제 계약 시점에 오가는 현금보다 훨씬 큰 이런 구조는 한국 제약업계 기술수출에서 익숙한 방식이다. 그럼에도 2억 달러에 육박하는 계약금은 한국 제약사가 성사시킨 기술수출 가운데 상위권에 드는 수준이다. 상대가 누구인지도 금액 못지않게 중요하다. 제넨텍은 아직 임상 개발을 마치지 않은 이 물질에 로슈 그룹의 개발 인프라와 글로벌 판매망을 얹어줄 수 있는 파트너다.
붐비는 비만 치료제 시장, 방향이 다른 베팅
HM17321은 LA-UCN2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며, 현세대 비만 치료제의 약점을 정면으로 겨냥한 물질이다. GLP-1 계열 치료제가 비만 치료의 판도를 바꿔놓긴 했지만, 환자가 감량한 체중 가운데 상당 부분이 지방이 아닌 근육량이라는 한계가 있다. 지방을 줄이면서 근육을 지키거나 오히려 늘리는 후보물질이라면, 단독으로 쓰든 기존 치료제와 병용하든 현재 시장을 장악한 약들의 가장 흔한 약점을 파고들 수 있다.
제넨텍이 돈을 내고 검증하려는 가설이 바로 이것이다. LA-UCN2라는 명칭은 이 물질이 우로코르틴-2(urocortin-2) 펩타이드의 지속형이라는 점을 가리킨다. GLP-1 계열과는 다른 수용체 경로로 작용하는 물질로, 단순히 체중계 숫자를 낮추는 데 그치지 않고 체성분 개선을 노리는 차세대 비만 신약 흐름에 속한다. 한미약품은 이 후보물질을 제2형 당뇨병 등 다른 대사질환까지 염두에 두고 개발하고 있어, 적응증이 체중 감량에만 머물지 않을 가능성도 열려 있다.
한미약품에 무엇이 남나
한미약품 입장에서 이번 계약은 초기 단계 자산을 즉시 현금으로 바꾸는 동시에, 업계에서 가장 까다로운 라이선스 파트너로 꼽히는 회사의 검증 도장을 받은 셈이다. 한국 시장 권리는 손에 쥔 채로다. 한미약품은 지난 10년 사이 굵직한 기술수출 계약이 파트너사로부터 반환되는 아픔을 겪은 뒤 기술수출 실적을 다시 쌓아가는 중이었다. 로슈 그룹이 대사질환 파이프라인에 보증을 서준 만큼, 한 번의 대형 계약에 그친 회사가 아니라 글로벌 경쟁력 있는 후보물질을 반복해서 만들어내는 회사라는 주장에 힘이 실리게 됐다.
리스크는 늘 그렇듯 같은 방향에 있다. 마일스톤 비중이 큰 계약은 수년에 걸친 임상시험에서 과학이 버텨줘야만 돈이 들어온다. 비만 치료제 분야는 특히 냉정해서, 훨씬 큰 회사들이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은 프로그램조차 기대에 못 미치는 데이터가 나오자 중단된 전례가 있다. 앞으로 지켜볼 지점은 두 가지다. 제넨텍이 HM17321에 어떤 임상 일정을 제시하는지, 그리고 근육 보존 효과에 대한 첫 인체 유효성 데이터가 어떻게 나오는지다. 업계에서 가장 안목 높은 구매자가 이 물질에 최대 23억 달러의 값을 매기게 만든 바로 그 특성이기 때문이다.